한식 읽기 좋은 날
Vol 10. 육지와 바다, 민물의 3중주 충청남도
땅과 민물, 바다의 3중주, 충청남도 ⑤
향토 미식 로드 _ 삭힌 김치
물길 따라 육지와 민물의 하모니, 예산
삽교천과 무한천이 빚은 예당평야를 중심으로 차령산맥과 가야산맥으로 둘러싸인 땅덩이. 추사 고택이 무게중심을 잡는 예산엔 반가 문화가 꽃피어 향토 음식도 남다른 품격을 지닌다. 반가 음식이 내림 음식이 되고 또 이 동네, 저 동네로 퍼져나가 터를 잡은 식문화. 예산 집장도, 보리막장도 세월을 입은 풍미로 여전히 빛을 발한다. 물길 따라 넉넉하게 모인 산과 바다, 땅의 산물. 시간의 미학을 좇다 삭힌 김치를 만나고, 시대를 건너 예당 어죽을 따라잡는다.
하얗게 피어오른 홍어 맛 삭힌 김치
‘홍어 맛 삭힌 김치’란 이름부터 생소하다. 오래 발효시켰지만 묵은 지는 아니요, 색이 바랜 배춧잎이 시래기를 닮았지만 양념한 김치 맛을 낸다. 코가 뻥 뚫리는 듯한 맛과 향이 홍어 비스무리한데, 그 정도로 자극적이진 않다. 겉치레 없이 순한 그 옛날 시골 음식을 닮았다.
2014년 김치로서는 ‘맛의 방주’에 최초로 오른 예산 대표 향토 음식. 전통 발효 음식의 뿌리인 김치는 원조 논쟁으로 달려드는 일본의 기무치 때문에 제 빛을 보지 못하다, ‘삭힌 김치’로서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됐다. 슬로푸드다운 레시피와 보존 가치를 마침내 인정받은 것. 당시 토종씨앗박물관 강희진 관장이 나선 예산 향토 음식 발굴에 힘을 보탠 건 <토담골>의 김형애 씨였다.
이후 삭힌 김치를 연구해 건강한 요리를 개발하며, 삭힌 김치 체험 교육 공간을 운영해왔다. 예약제로 식사도 가능한데, 하루 전에 연락하면 주인장의 손맛이 돋보이는 삭힌 김치찌개나 삭힌 김치 들깨탕을 맛볼 수 있다.
오래 발효시켰지만 묵은 지는 아니요,
색이 바랜 배춧잎이 시래기를 닮았지만 양념한 김치 맛을 낸다
코가 뻥 뚫리는 듯한 맛과 향이 홍어 비스무리한데, 자극적이진 않다
겉치레 없이 순한 그 옛날 시골 음식을 닮았다
예산 출신이 아닌 김형애 씨는 우연한 기회로 삭힌 김치를 접했다. 주말농장으로 내려와 농사를 짓던 어느 날, 동네 사람들과 모여 앉아 밥을 먹었는데 ‘삭힌 김치’를 지져 먹는 걸 난생처음 목격했다. 혀를 치고 올라오는 톡 쏘는 기묘함. 독특한 그 맛을 재현하려 동네 어르신을 찾아다니다 마침내 레시피를 익혔다. 사실 언뜻 보면 김치 담그는 법과 유사한데, 하나씩 따지고 보면 재료 선택부터 숙성, 보관까지 철저히 다르다.
일단 토종 종자 ‘구억배추’를 사용할 것. 김장할 때 쓰는 일반 배추(호배추)는 부드러운 질감으로 삭히면 오래 보관할 수 없다. 한데 구억배추는 잎사귀가 길고 질기며 속이 텅 빈 것이 특징. 김장 김치 재료로서는 질이 떨어지지만 ‘삭힌 김치’를 담그기엔 안성맞춤이다.
흡사 백김치처럼 하룻밤 소금에 절인 배추를 깨끗이 씻어 파와 마늘, 생강, 새우젓으로 양념하는 게 1단계. 잎사귀 하나하나 속을 채울 필요 없이 그저 버무리면 된다. 이때 염도도 중요한데 삼삼하게 간을 해야 쉽게 삭을 수 있다. 완성된 배추를 깨진 항아리에 담는 게 2단계. 배추의 수분이 모두 빠져나가야 삭기 시작하는데, 쓸모없었던 항아리 구멍이 물 빠짐을 책임진다. 실온 숙성 단계에선 변함없는 관심이 필수. 항아리 속 배추들이 삭는 시점이 각기 달라 윗부분에 하얀 곰팡이가 피어오르면 먼저 꺼내 냉동고에 넣고, 쌓인 순서를 바꿔 일정량을 추스른 다음 다시 숙성시킨다. 특히 가장 아랫부분에 놓인 배추는 무를 수 있어 계속 뒤적여줘야 한다. 완전히 삭을 때까지 5-7일마다 한 번씩 상태를 체크하는데, 50포기 정도 들어가는 항아리에 넣어야 위아래 모두 고르게 삭힐 수 있다. 보통 10-11월경 담가 3월 말이나 4월 초부터 먹는데, 삭는 즉시 바로 냉동고에 넣어야 그 맛이 그대로 유지된다. 또 항아리를 따뜻하게 보관하면 좀 더 빨리 삭기도 한다.
일반 배추는 부드러운 질감으로 삭히면 오래 보관할 수 없다.
한데 구억배추는 잎사귀가 길고 질기며 속이 텅 빈 것이 특징.
김장 재료로서는 질이 떨어지지만 ‘삭힌 김치’를 담그기엔 안성맞춤이다.
하얀 곰팡이 맛으로도 먹는다는 ‘삭힌 김치’는 배추 위로 눈꽃송이가 필 때, 보송보송하고 냄새도 좋아 최고의 식재료로 거듭난다. 단 생김치로는 먹지 않고 조리 과정을 거치는데, <토담골>에선 삭힌 김치찌개와 삭힌 김치 들깨탕으로 구수한 풍미를 살린다. 김치 맛을 해치지 않도록 심플하게 조리하는 것이 특징. 냄비에 포기김치를 통째로 넣고 쌀뜨물을 부어 바글바글 끓여준다. 한창 끓어오르면 들기름 한 숟가락과 청양고추를 조금 넣고, 마지막에 들깨가루와 파, 고추를 넣으면 완성. 알싸한 맛이 강한 토종 배추가 곰삭은 청량감을 안기고, 들깨향으로 그윽해진 고소한 국물이 진한 온기를 남긴다. 묵은 지를 물에 헹궈 조린 것 같기도 하고, 된장 맛도 묘하게 감돈다. 여전히 살아 있는 배추의 식감. 씹는 맛을 즐기는 사이 부드럽게 넘어간다. 삭힌 김치는 따로 구매도 가능하다.
단 생김치로는 먹지 않고 조리 과정을 거치는데,
<토담골>에선 삭힌 김치찌개와 삭힌 김치 들깨탕으로 구수한 풍미를 살린다
무엇보다 김치 맛을 해치지 않도록 심플하게 조리해야 한다
Where to eat?
토담골
A 충청남도 예산군 봉산면 금치길 216-26
T 041-337-0357, 010-2019-0357
H 12:00-20:00 (사전 전화 예약 필수)
에디터 전채련 사진 윤동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