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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 9. 남해 품은 食의 바다, 경상남도
남해 품은 食의 바다, 경상남도 ⑨
향토 미식 로드_다랭이논&죽방렴
거친 자연을 품은 남해의 삶

쪽빛 바다에서 세찬 바람이 불면, 가파른 능선 따라 층층이 이어진 다랭이논의 초록 물결이 출렁인다. 그때 수면 위로 삐죽 삐져나온 죽방렴에선 은빛 멸치가 파닥거린다. 험준한 산세와 벼락같은 바다. 남해 사람들은 끈질긴 생명력과 빛나는 지혜로 삶의 터전을 가꿔왔다. 거친 자연을 품고 대대로 전해온 남해의 향토 농업과 어업.
산비탈 따라 바다까지 층층이 다랭이논

가천 다랭이마을에 들어서면 가파른 절벽에 층을 이룬 거대한 계단식 논을 볼 수 있다. 길도, 집도, 논들도 산허리 따라 구불거리며 바다를 바라본다. 45도 경사에 이뤄진 1백8개의 층층 계단 위에 6백80여 개의 논이 펼쳐져 있다.
이 마을은 바다를 끼고 있지만, 어업과는 무관하다. 가파른 해안절벽을 끼고 있어 배를 댈 수 없기 때문. 바다에서 얻을 거라곤 떠밀려온 미역 줄기나 다시마가 고작이었다. 그래서 마을 주민들은 물고기 잡이 대신 농사로 먹고 살았다. 산비탈을 깎고 돌들을 일일이 들어내 계단마다 담을 쌓고, 바닥엔 진흙을 펴 발라야 물 빠짐을 막아 논으로 쓸 수 있었다. 얼마나 숱한 땀방울을 흘렸을까. 고된 삶의 흔적이 느껴진다.
산비탈을 깎고 돌들을 일일이 들어내
계단마다 담을 쌓고, 바닥엔 진흙을 펴 발라야
물 빠짐을 막아 논으로 쓸 수 있었다.
얼마나 숱한 땀방울을 흘렸을까.

마을에선 우스갯소리처럼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다. 옛날에 다랭이 마을에 살던 한 농부가 일을 마친 다음 자신의 논을 세어보았다. 몇 번을 세어봐도 한 배미(논을 세는 단위)가 모자랐다. 결국 세는 것을 포기하고 집에 가려고 삿갓을 집어 드니 그 밑에 논 한 배미가 숨어 있었다는 것. 그 정도로 작은 넓이의 논도 있었다는 얘기다. 쌀 한 되도 나지 않을 것 같은 작은 논부터 제법 큰 논까지, 다랭이논은 넓이도 생김새도 제각각이다.
문화재청은 다랭이논을 2005년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제15호로 지정했다. 다랭이논과 더불어 마을 전체가 문화재로 지정된 셈. 그래서 이곳 주민들은 집을 헐고 새로 지을 수 없다. 그뿐 아니라 논들이 높고 험한 곳에 있어 농기계를 사용할 수도 없다. 직접 소를 몰고 쟁기질과 써래질을 해야만 한다. 이제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 하기엔 꽤 벅찬 작업. 작물 없이 방치된 논도 꽤 눈에 띈다.

논들이 높고 험한 곳에 있어 농기계를 사용할 수도 없다.
직접 소를 몰고 쟁기질과 써래질을 해야만 한다.
해풍의 영향으로 작물에 해충이 생기는 일이 적어 친환경 농법이 이뤄진다
이곳의 특산품은 쌀과 마늘, 시금치. 해풍의 영향으로 작물에 해충이 생기는 일이 적어 친환경 농법이 이뤄진다. 생산량이 많지는 않지만 유기농 농산물로 큰 사랑을 받고 있다. 특히 다랭이논에서 생산된 유기농 현미 쌀로 만든 다랭이팜 생막걸리와 유자막걸리는 담백하고 깔끔한 맛으로 애주가 사이에선 꼭 맛봐야 할 술로 손꼽힌다.

Tip. 다랭이마을의 '지겟길'이 뭐야?
가천 다랭이마을엔 ‘소몰이살피길’(524m), ‘상수리길’(200m), ‘망수길’(414m) 등 몇 개의 마을길이 있다. 소를 몰고 다니며 소에게 풀을 뜯게 했다는 소몰이살피길, 마을과 다랭이논 사이를 걷는 상수리길, 고기 떼가 들어오는지 망을 보던 망수의 발자취를 재현한 망수길 등을 즐길 수 있다. 또 남면 평산항부터 가천 다랭이마을까지 이어지는 ‘지겟길’(16km)도 있다. 남해의 수려한 자연환경에 감탄이 절로 나오지만 이 길에는 무거운 지게를 짊어지고 산비탈을 깎아 만든 길을 오가던 선조들의 고달픈 삶이 깃들어 있다.
5백 년 전통 고기잡이 죽방렴

우리나라 원시 어업의 대명사로 꼽히는 죽방렴. 창선도와 남해 본섬 사이 지족해협에 있다. 석양 무렵 지족해협에 가면 은빛 수면 위로 꿋꿋이 서 있는 죽방렴과 작은 배들이 연출하는 풍광이 가히 천하절경에 가깝다.
조수 간만의 차가 크고 물살이 빠르며
수심이 비교적 얕은 곳에 설치한다.
밀물 때 조류를 따라 들어온 물고기는
죽방렴의 함정에 빠져 썰물이 돼도 빠져나가지 못한다.
죽방렴의 역사는 5백년이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예종 때 만들어진 「경상도 속찬지리지」 ‘남해현조’ 편엔 “방전에서 석수어, 홍어, 문어가 산출된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방전이 바로 죽방렴. 지족해협에 설치된 23개의 죽방렴은 2010년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제71호로 지정된 데 이어, 2015년엔 국가중요어업유산 제3호로 지정됐다.
죽방렴은 조수 간만의 차가 크고 물살이 빠르며 수심이 비교적 얕은 곳에 설치한다. 조류가 흘러오는 쪽을 향해 참나무 말목을 V자 모양으로 일정하게 박고 말목 사이에 대나무를 엮어 울타리를 만든 뒤 그 안에 그물을 엮어 넣는다. 그물 끄트머리엔 물고기를 가두는 임통을 설치해둔다. 밀물 때 조류를 따라 들어온 물고기는 죽방렴의 함정에 빠져 썰물이 돼도 빠져나가지 못하는데 임통이 밀물 때는 열리고, 썰물 때는 닫히도록 설계돼 있기 때문.

바다 위에서 두 팔 벌리고 있다 들어오는 고기는 맞아들이고
나머지는 제 갈 길을 가도록 놓아준다.
죽방렴을 바라보는 어부의 마음은 여유롭고 풍요롭다.
어부들은 하루 두세 차례 물때에 맞춰 나가 죽방렴에 걸린 물고기를 건져 올린다. 주로 5-8월에 멸치와 갈치를 비롯해 학꽁치, 장어, 도다리 등이 잡힌다. 잡힌 물고기 중 멸치가 약 80%.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죽방멸치’다. 지족해협 근처는 물고기 먹이가 많고 유속이 세서 멸치의 육질이 단단하다. 또 잡는 과정에서 멸치에 상처가 나지 않아 최고의 품질로 인정받는다. 이것이 그물로 잡은 멸치보다 수십 배는 비싼 가격으로 죽방멸치가 팔려 나가는 이유. 잡은 멸치는 회로도 먹지만 대부분 배에서 내리자마자 삶아 말려 우리가 아는 ‘마른 멸치’가 된다.
죽방렴은 자연 친화적이면서도 선조의 지혜가 고스란히 녹아 있는 어획 방식. 바다 위에서 두 팔 벌리고 있다 들어오는 고기는 맞아들이고 나머지는 제 갈 길을 가도록 놓아준다. 놓친 물고기를 아쉬워하면서 더 많이 잡겠다고 아등바등하지도 않는다. 때로 잡히는 물고기가 적어도 다른 날엔 분명 수확이 있을 거라 믿기 때문이다. 죽방렴을 바라보는 어부의 마음은 여유롭고 풍요롭다.


Tip 죽방렴 멸치잡이, 직접 체험하려면?
남해군과 문화재청은 지족어촌체험마을 주관으로 죽방렴의 원리를 익히고 직접 체험해보는 ‘생생 문화재’ 프로그램을 오는 10월까지 운영한다. 직접 죽방렴에 들어가 원시 어업을 체험해 자연환경을 슬기롭게 활용한 선조들의 지혜를 느낄 수 있다. 체험 프로그램에 참여하지 않고도 죽방렴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방법도 있다. 남해 농가섬을 찾으면 된다. 농가섬까지 다리가 이어져 있는데, 이 다리가 죽방렴을 가로질러 나 있어 둥근 임통 내부의 모습을 내려다볼 수 있다.
에디터 정민아 사진 윤동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