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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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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 62. 양념이라는 깊고도 넓은 세계

천천히 정성스레 빚어낸 흑초의 새콤달콤한 매력- 대한민국 식품명인 제73호 현경태 흑초 명인

한식을 빚다

2023/03/29 15:5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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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맛 하면 떠오르는 식초는 곡물이나 과일 따위로 술을 빚은 뒤, 그 술의 알코올을 발효시켜 만드는 한식의 대표적인 양념이다. 특히 현미를 자연 발효해 만드는 흑초는 ‘식초의 왕’이라 불린다. 비타민과 미네랄, 아미노산 등 영양소가 워낙 풍부한 덕분이다. 경북 영천에서 3대째 흑초를 만들며 대한민국 식품명인 제73호에 지정된 현경태 명인에게 흑초의 매력과 비밀을 들어보고자 생초록농원을 찾았다.

노윤영(편집실) 사진 이대원(싸우나스튜디오)

Q: 조부 때부터 3대째 흑초를 만들고 계시죠. 아드님도 전수자가 되셨으니 4대째 이어지네요.

우리 집안은 오래전부터 과수원을 했는데, 마당 한쪽에 장독대가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우리 가정에서 식초는 된장, 간장 등과 함께 빠져서는 안 되는 생활필수품이었어요. 제 조상님들은 생활에 꼭 필요한 장류를 직접 담가 오셨습니다. 흑초도 마찬가지였죠.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 일손을 도우면서 자연스럽게 흑초 조리법을 몸으로 익혀왔고, 그러면서 흑초와 사랑에 빠졌습니다. 한번 몸에 익힌 조리법은 절대 사라지지 않더군요.

Q: 식초는 익숙하지만, 흑초는 다소 낯설게 느껴집니다.

1766년(영조 42년) 유중림이 편찬한 <증보산림경제>는 조선시대 식생활 문화를 가늠할 수 있는 귀중한 문헌인데, 여기에 쌀초를 제조하는 방법이 기록돼 있습니다. 현미로 만든 술이 초산균을 만나면 쌀초가 되는데, 이 쌀초를 오래 묵혀두면 흑갈색의 흑초가 됩니다. <증보산림경제>에 적힌 쌀초 조리법을 기반으로 집안 어르신들이 과수원 고방에서 흑초 제조비법을 복원한 것이죠. 누룩과 유기농 현미로 빚은 쌀초를 숙성해 빚은 흑초는 일반 식초와 달리 톡 쏘지 않습니다. 천천히 정성으로 빚었기에 부드럽고 은은하며 담백한 장 향의 신맛과 쓴맛을 동시에 느낄 수 있죠.

Q: ‘초두루미’라는 항아리를 통해 흑초를 만들어낸다고 하지요.

초두루미는 선조들이 식초를 만들기 위해 사용한 항아리를 뜻합니다. 선조들은 부뚜막에 자리 잡은 초두루미에다 누룩으로 막걸리를 빚은 다음 그 술을 발효시켜 식초를 만들었지요. 초두루미에는 다른 크기의 구멍이 두 개 있는데, 작은 구멍에서 공기가 유입돼 큰 구멍으로 공기가 이동하는 과정에서 대류 현상이 일어납니다. 부뚜막 온도는 항상 따뜻하기 때문에 초두루미 안에서는 발효가 활발히 진행되고 가스와 수증기 등이 증가해 빠져나가면서 대류 현상을 가속시켜 온도를 조절해주죠. 초두루미의 내부가 넓기에 공기의 양도 조절되고요. 이런 대류 현상을 통해 질 좋은 흑초가 탄생하게 됩니다.

Q: 흑초를 만드는 데 3년 이상의 긴 시간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특히 종초균을 배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들었습니다. 종초균이란 무엇인가요?

흑초를 만들려면 먼저 술을 빚어야 하는데 물을 적게 넣으면 알코올 도수가 높아지고 많이 넣으면 도수가 낮아집니다. 알코올 도수는 9%가 넘으면 효모의 생육이 저해되기 때문에 발효가 잘 안 됩니다. 그래서 전통 흑초를 만들려면 알코올 도수를 6~ 7%로 유지한 상태에서 건강한 종초를 넣어 초산 발효 과정을 거쳐 잡균이 들어가지 않도록 밀봉하고 오랜 기간 숙성하면 흑초가 만들어집니다. 최소 3년에서 20년 가까이 자연에서 숙성하는 과정이 필요하죠. 종초균은 초모 또는 초산균을 증식해 식초를 발효시키는 초모 씨앗의 균을 뜻합니다.

식초를 담글 때 쓰는 항아리인 초두루미와 누룩 틀 등 흑초를 만들 때 쓰이는 도구들

Q: 왜 현미를 이용하나요?

백미보다 좀 더 풍부한 영양소를 만들어내니까요. 현미에는 단백질이 풍부하게 함유돼 있어요. 특히 발효 과정에서 필수 아미노산과 유기산 등을 만들어내지요.

Q: 흑초를 만들려면 환경이 중요하다고 말씀을 하신 적 있죠.

제가 흑초를 만들고 있는 경북 영천시 청통면에는 비옥한 토지와 저수지가 많습니다. 흑초를 만드는 데 최고의 환경인 셈입니다. 우리 지역에서 재배되는 유기농 현미는 영양분이 풍부하고 단백질이 다량 함유돼 있어 영양 만점의 흑초를 제조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더불어 좋은 흑초를 만들려면 물도 중요해요. 물은 모든 주류에서 필수적인 원료이고 술의 향미와 질감에 큰 영향을 미치거든요. 좋은 물이 있으면 맛 좋은 술을 만들 수 있고, 좋은 술이 있으면 우수한 흑초를 만들 수 있습니다. 청통면의 저수지에서 나는 물은 맑고 깨끗합니다. 그렇기에 제가 만든 흑초가 목 넘김이 부드럽고 기능이 우수한 것이죠.

Q: 흑초의 맛과 가치를 좌우하는 요소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흑초의 원주인 전통 곡주에서는 크게 두 가지 향이 납니다. 누룩 특유의 구수한 향과 과실 향입니다. 과실 향은 누룩의 밀기울(밀 껍질) 성분이 발효되면서 생성하는 향기로 저온 숙성한 흑초에서도 느낄 수 있습니다. 또한 좋은 흑초에서는 새콤하고 구수한 장 향기가 나고, 누룩균에서 생성된 담백한 신맛과 쓴맛, 깔끔하면서도 은은한 맛을 느낄 수 있죠. 일부 흑초에서는 첨가제를 넣어 단맛을 내지만 전통 흑초에서는 절대 이런 행위를 하지 않습니다. 더불어 자체 곡물로 발효한 전통주가 아닌 어떠한 알코올도 섞여서는 안 됩니다.

Q: 흑초는 영양분이 풍부한 만큼 효능 또한 뛰어나겠군요.

공장에서 대량 생산하는 식초는 주정을 주원료로 만든 술에 산소와 초산균을 깊숙이 주입해 기계로 심부 발효시킵니다. 그래서 하루 이틀이면 완성되고 신맛이 강합니다. 반면 전통 식초는 곡물과 누룩으로 빚은 술에 종초를 투입해 초막을 생성시키면 천천히 표면에서 자연 발효됩니다. 이 발효 숙성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60여 종의 유기산과 7종의 필수 아미노산 등이 생성됩니다. 덕분에 다이어트 식품으로 제격이고 피로회복에도 도움이 되죠. 피부 미용과 수족 냉증에도 좋고요.

Q: 일반 가정에서는 흑초를 어떻게 활용해 먹을 수 있는지 말씀해주세요.

기본적으로는 흑초 15mL에다 물을 5~10배가량 희석해 마시면 됩니다. 기호에 따라 우유나 벌꿀을 넣어 마시는 것도 좋은 방법이고요. 탕류나 생선회, 초밥, 샐러드 등에 양념으로 곁들이면 맛도 좋고 건강에 많은 도움이 됩니다.

Q: 흑초라고 하면 일본을 떠올리는 분들이 많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흑초는 부뚜막 문화에서 시작된 우리나라의 전통 식초입니다. 일본 가고시마의 장수촌 후쿠야마 마을은 흑초 하나로 전체를 먹여 살린다고 하지요. 전 세계인에게 주목받고 있는데, 우리나라의 흑 초 또한 그에 못지않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도공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항아리를 만들어 흑초를 만든 데서 현재의 흑초가 비롯됐다는 주장도 있는 만큼, 자부심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정부의 지원만 따라준다면 우리 흑초가 전 세계에 좀 더 알려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많은 분의 관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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