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식에 대한 다채로운 이야기를 전하는 온라인 매거진
Vol 11. 대를 이어온 맛과 멋, 경상북도
대를 이어온 맛과 멋, 경상북도 ⑤
향토 미식 로드 _ 수운잡방 접빈객 상차림
종가 음식의 명가, 안동
유교 문화의 원형을 고스란히 간직한 전통의 고장, 안동. 수백 년 된 고택에선 여전히 사람이 살면서 함께 나이를 먹어간다. 조상에 대한 존경심과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종가들은 손님을 제대로 대접하는 것을 최고의 덕목으로 여겼고, 그렇게 태어난 정성스러운 요리들은 내림 음식으로 보석처럼 남았다. 곱게 차린 상을 보고 있노라면 귀하게 대접받는 기분에 음식 맛을 보기도 전에 행복해진다.
할아버지와 손자가 쓴 5백 년 조리서 수운잡방 접빈객 상차림
「수운잡방」은 1500년대 중반 조선 중종 때, 광산 김씨 탁청정 김유 선생이 필사체로 남긴 음식 조리서다. 또 그의 손자인 계암 김령 선생이 뒤를 이어 전통 조리법에 대한 내용을 덧붙였다. 책은 통권으로 이뤄졌으며, 전편은 할아버지가 남겼고, 손자는 후편을 썼다. 조리서는 설월당 종가에서 5백여 년을 보존해왔다.
이 조리서는 국내 현존하는, 출처가 확실한 조리서 중에서는 가장 오래된 책으로 꼽힌다. 재료의 사용부터 조리법까지 구체적이고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어 당시 안동 주변 지역의 식문화를 파악할 수 있다. 만약 이 기록이 없었다면 1500년대 우리 민족은 어떤 음식과 술을 먹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수운잡방需雲雜方은 '음식을 먹으면서 기체를 양성하고, 큰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린다'는 뜻이다.
수운잡방은 국내 현존하는 출처가 확실한 조리서 중에서는 가장 오래된 책
이 기록이 없었다면 1500년대 우리 민족은 어떤 음식과 술을 먹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책에는 총 1백21가지 조리법이 적혀 있다. 김치류 17항, 초류 5항, 장 9항, 주류 59항 등으로 구성됐으며, 그 밖에도 국수 빼는 법, 과자 만드는 법 등이 담겨 있다. 하지만 현대 한자가 아닌 고한자로 적혀 있어 주역으로 풀어내야 하는 난도 높은 조리서라 학계의 연구가 절실했다. 서울대, 성균관대, 안동대에서 번역에 참여했으며, 지금까지도 안동국학진흥원과 종가가 함께 연구하고 있다. 번역 이후 종가에서 본격적으로 음식 복원 작업에 들어가 지금의 상차림을 맛볼 수 있게 됐다.
양반가에서 귀한 손님에게 대접하는 요리 레시피를 담은 「수운잡방」은 하루아침에 쓰인 조리서가 아니다. 손님에게 대접할 창의적인 음식을 꾸준히 연구하고, 고민하고, 기록하며 완성한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환절기에 비염으로 고생하는 손님을 맞을 때는 비염에 좋은 식재료로 만든 요리를 대접한다. 그걸 기록해두고 있다가 다음에 또 같은 손님을 맞게 되면 기록된 내용을 보고 해당 요리를 준비했다.
수운잡방 접빈객 상차림은 귀한 손님을 맞이할 때 내던 5백년 전 상차림
노란빛 치자로 만든 황밥, 마와 소고기로 완성한 서여탕,
은어‧새우‧청포묵 등으로 만든 삼색어아탕, 꽃물로 빛깔을 낸 청포묵과 고기,
채소에 육수를 자작하게 넣은 분탕, 가지를 껍질째 썰어 구워낸 모점이,
곱게 채 썬 생강을 곁들인 오이지인 향과저 등으로 구성됐다
안동에 있는 <수운잡방 연구원>에서는 그 복원 음식들로 구성한 '수운잡방 접빈객 상차림'을 맛볼 수 있다. 귀한 손님을 맞이할 때 내던 5백년 전 상차림 그대로를 복원했다. 노란빛 치자로 만든 황밥, 마와 소고기로 완성한 서여탕, 은어•새우•청포묵 등으로 만든 삼색어아탕, 꽃물로 고운 빛깔을 낸 청포묵과 고기, 채소에 육수를 자작하게 넣은 분탕, 가지를 껍질째 썰어 구워낸 모점이, 곱게 채 썬 생강을 곁들인 오이지인 향과저 등으로 구성됐다.
복원 음식에는 고기, 해산물, 채소 등 육해공의 모든 식재료가 들어간다. 현재 서양 요리에서 '펜넬'로 알려진 '회향', 피클 만들 때 쓰는 향신료인 '정향'도 쓰인다. 놀랍게도 현대인이 즐겨 먹는 플레인 요구르트도 있다. 바로 '타락'이다. 다만 현대의 요구르트는 프로바이오틱스 유산균을 사용하지만, 타락은 막걸리를 이용해 만든다. 후식으로 나오는 '전약'도 독특하다. 콜라겐의 주성분인 식용 아교와 대추, 꿀 등으로 만들었는데, 양갱과 모습이 흡사하다. 소고기의 살코기 부위를 면으로 만든 육면 또한 다른 조리서에서는 볼 수 없는 고급 음식이다.
놀랍게도 현대인들이 즐겨먹는 플레인 요거트도 있다
바로 '타락'이다. 다만 현대의 요거트는 프로바이오틱스 유산균을
사용하지만, 타락은 막걸리를 이용해 만든다
3년 전 신라호텔 한식당 <라연>은 광산 김씨 설월당파 15대 김도은 종부와 함께 현대에 맞게 재해석한 수운잡방 상차림을 메뉴로 선보였는데, 같은 해 미쉐린 3스타를 받는 쾌거를 거두면서 「수운잡방」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우리나라보다 오히려 프랑스 등의 유럽에서 더 큰 관심을 보였다. 지난 8월에는 프랑스의 유명 레스토랑인 <피에르 가니에르> 파리 본점의 김도현 수셰프가 안동 군자마을 설월당에 직접 방문해 삼색어아탕의 맛을 보고 교류를 부탁하기도 했다. 안동을 넘어 우리나라의 자랑이자 앞으로도 계승, 발전시켜야 할 문화유산임이 틀림없다.
Where to eat?
수운잡방 연구원
A 경상북도 안동시 포도길 12
T 010-9734-3050 (15일 전 예약 필수)
수운잡방 상차림의 꽃 三色三味
5백 년 전 음식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고운 자태를 뽐내는 「수운잡방」의 요리들. 계절에 따라 약이 되는 재료를 넣어 건강에도 좋다. 조리서에서 복원한 요리 중 특히 주목할 세 가지.
귀한 재료로 화려하게 삼색어아탕
수운잡방 접빈객 상차림에서 첫눈에 쏙 들어오는 음식은 단연 삼색어아탕이다. 보양 식재료로 만든 고급 요리로 빛깔부터 곱고 화려하다. 그만큼 정성이 많이 들어간다. 비늘과 껍질을 제거한 은어 혹은 숭어를 포로 뜬 뒤 녹두 가루를 입혀 끓는 물에 삶은 후 다져둔다. 여기에 녹두 가루, 된장, 흰파 등을 넣어 새알같이 동그란 모양의 완자를 만든다. 대하는 껍질을 벗긴 후 두 쪽으로 편을 뜬다. 여기에 치자로 노란빛 묵을, 맨드라미 꽃물로 분홍색 묵을, 시금치나 부추로 초록색 묵을 만들어 삼색으로 구성한다. 은어를 삶은 물에 회향을 넣고 집간장으로 간을 해 탕을 끓인다. 이 탕을 앞서 만들어둔 완자, 대하, 녹두묵에 넣으면 완성된다. 정갈하고 단정한 맛은 입에 명품을 머금은 느낌을 준다.
꽃물 들인 녹두묵 분탕
채소와 꽃물로 어여쁜 색을 낸 청포묵이 인상적인 분탕은 수운잡방 상차림을 빛내는 음식이다. 도라지와 미나리는 녹두 가루에 묻혀 쪄낸다. 예부터 녹두가 많이 났던 안동에선 고단백에 감칠맛이 좋은 녹두를 다양한 요리에 활용했다. 일반적으로는 죽을 쑤어 먹었지만, 양반가에선 녹두로 한 차원 더 높은 음식을 만들었다. 가운데에는 소고기를 길게 썬 육면을 얹어 푸짐하게 장식한다. 색깔의 조화가 아름다워 눈과 입이 함께 행복해지는 요리다. 고깃국물을 자작하게 곁들여 먹으면 담백한 맛이 일품이다.
아삭아삭 상큼한 맛 향과저
향과저는 오이김치의 일종이다. 어린 오이에 뜨거운 장국을 부어 하루 동안 절인 후, 채 썬 생강으로 속을 채운다. 현대에 와서는 뜨거운 장국 대신 뜨거운 소금물로 절인다. 향과저는 기름진 음식을 먹을 때 주로 곁들이던 김치다. 요즘 스파게티, 피자와 함께 먹는 오이 피클과 흡사하다. 아삭아삭 씹히면서 적당히 상큼하다.
+MINI INTERVIEW
손끝으로 재현된 5백 년의 내림 맛
김도은 종부(광산김씨 설월당파 15대)
안동 군자마을에 자리 잡은 광산 김씨 종가 설월당에서 만난 김도은 종부. 고운 한복을 차려입은 김 종부는 야무진 손끝으로 소고기를 잘라 육면을 만들고, 오이로 향과저를 만드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수운잡방」의 요리들은 굉장히 체계적이면서도 약이 되는 요리로 구성되어 있어요." 종부의 표정에서부터 자부심이 새어 나왔다.
5백 년 넘게 집안에서 고조리서를 분실하지 않고 보관할 수 있었던 비결은?
「수운잡방」은 수백 년간 임진왜란 등의 전쟁을 겪으면서도 무사히 보관될 수 있었다. 윗대 어르신이 설월당 종택 주춧돌에 땅을 파고 묻어둔 덕분이다. 그렇게 가보로 전해져 지금에 이르게 됐다. 5백 년 전 쓰인 유일무이한 조리서를 더 널리 알려야겠다는 생각은 항상 있었으나 비용 부분 등 여러 가지 문제 때문에 여의치 않았다. 그러다 2013년 수원잡방 연구원을 설립하면서 본격적으로 복원 작업에 나서게 됐다.
「수운잡방」 요리의 대표적인 특징은 무엇인가?
모든 요리에 고춧가루가 전혀 들어가지 않는다. 고추가 임진왜란 전후로 우리나라에 들어왔으므로 훨씬 전에 기록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춧가루 대신 다양한 향료로 적절하게 양념을 한다. 고기 요리면 육류에 맞는 향신료인 정향을 사용하고 해산물이면 이에 맞는 향신료인 회향을 사용했다.
조상들의 슬기와 지혜를 엿볼 수 있는 요리는?
5백 년 전에 우리나라에서 떠먹는 요구르트를 먹었다는 사실이 신기하지 않은가. 우유와 막걸리를 이용한 ‘타락’이 그것이다. 후식으로 먹는 전약에는 정향이 들어가 몸을 따뜻하게 하고 육류에서 오는 식중독을 없애주는 역할을 한다. 현대에도 찾아보기 힘든 음식이다.
집안에서 내려오는 독특한 김치류는 어떤 것이 있나?
옛날에는 김치를 ‘저’라고 불렀다. 오이를 전날 미리 담근 후 다음 날 집간장으로 맛을 내고 생강을 올린 오이김치인 ‘향과저’를 소개하고 싶다. 어떤 찬에도 곁들이기 좋으며 아삭아삭하면서도 살짝 새콤하다. 가지로 만든 김치인 ‘즙저’도 있다. 가지를 깨끗하게 씻어 물기를 제거하고 집간장, 밀기울, 천일염으로 맛을 냈다.
집안에서 내려오는 독특한 전통주, 발효주를 소개해달라.
만병을 다스린다는 ‘오정주’가 있다. 껍질 벗긴 황정, 천문동, 송엽을 멥쌀과 누룩으로 담근 술이다. 귀한 분들에게만 대접했다. 창포로 만든 창포식초는 음식에도 사용했고 건강 음료처럼 물에 타서 마시기도 했다.
음식 복원과 관련된 앞으로의 계획은?
수운잡방 연구원이 경상북도, 안동시, 신라호텔의 도움으로 군자마을 쪽으로 증축 오픈한다. 현재 공사 중이며 내년 1-3월 완공될 예정이다. 「수운잡방」을 더욱 널리 알릴 기회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종가 혼자서 음식을 복원, 발전시키는 데는 한계가 있다. 앞으로도 더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야 하고 국가적인 차원에서 더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
글 이현경 사진 강현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