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식에 대한 다채로운 이야기를 전하는 온라인 매거진
Vol 11. 대를 이어온 맛과 멋, 경상북도
대를 이어온 맛과 멋, 경상북도 ①
향토 미식 로드 _ 음식디미방 정부인상
조선 시대를 거쳐 우리 정신 문화를 이뤘던 유교의 본고장, 경상북도. 수많은 서원과 종가의 기품이 낙동강가에서 생겨나고 이어졌다. 조상에 대한 자긍심은 후손을 한 마을에 똘똘 뭉치게 했고,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혹은 할머니의 할머니가 쓴 조리서가 수백 년 후에도 가보로 전해졌다. 제사를 받들고 손님을 대접하는 건 종손의 도리. 타인을 배려하고 섬기는 마음이 음식에 면면히 반영됐다. 갓 지어 차려낸 밥상 위에는 오방색 고명이 곱게 꽃을 피우고, 손님을 귀히 대하는 마음을 담아 몸에 약이 되는 재료로 만든 보양식을 대접했다. 태백산맥, 동해 바다, 낙동강에서 얻은 다채로운 제철 재료로 본연의 맛을 살리는 담백한 요리가 종부의 손맛으로 내려왔다. 지조 높은 선비들은 메밀묵을 먹으며 나라의 태평성대를 기원했고, 때로는 허구로 제사를 지내며 제삿밥을 먹는 해학도 보였다. 켜켜이 쌓여가는 시간 속에서 가치를 더해가는 전통의 맛. 고택 대청마루에 앉아 단정하게 차린 종가의 맛에 취해본다.
조상에 대한 자긍심은 후손을 한 마을에 똘똘 뭉치게 했고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혹은 할머니의 할머니가 쓴 조리서가
수백 년 후에도 가보로 전해졌다
타인을 배려하고 섬기는 마음이 음식에 면면히 반영됐다
갓 지어 차려낸 밥상 위에는 오방색 고명이 곱게 꽃을 피우고
손님을 귀히 대하는 마음을 담아 몸에 약이 되는 재료로 만든 보양식을 대접했다
전통을 간직한 자연의 맛, 영양
'영남의 영산'으로 꼽히는 일월산을 중심으로 청정 자연과 풍부한 문화유적을 간직한 영양. 입신양명을 좇기보단 학문 연구에 뜻을 바친 선비들은 일월산의 정기가 어린 이곳을 삶의 터전으로 잡았다. 어수리부터 곰취, 방풍, 취나물까지…. 몸에 이로운 산채들이 곳곳에 널렸다. 전통의 향과 자연의 맛을 품은 밥상이 식객을 부른다.
3백 년 전 여성 군자의 손맛 음식디미방 정부인상
17세기 중엽, 조선 양반가에선 어떤 음식을 먹었을까? 타임머신을 탄 듯, 그 시대의 요리를 만들고 맛볼 수 있는 곳이 경북 영양군에 있다. 바로 올 4월 개관한 <장계향문화체험교육원>. 약 3백50년 전 쓰인 한글 조리서이자, 여성이 쓴 최초의 조리서 「음식디미방」을 주제로 각종 체험 프로그램이 운영된다.
음식디미방의 '디'는 '알지(知)'의 옛말로
'음식 맛을 아는 방법'이라는 의미를 품고 있다
이 책의 저자 장계향 선생은 신사임당 못지않은 여중군자로 꼽힌다
이 책의 저자 장계향 선생(1598-1680)은 신사임당 못지않은 여중군자女中君子로 꼽힌다. 뿌리 깊은 가문에서 무남독녀로 자라난 장계향은 소학을 스스로 깨우칠 정도로 영특했고, 시•서•화에도 능했다고 전해진다. 재령 이씨 석계 이시명(1590-1674)과 혼인해 6남 2녀를 낳았는데, 사후 셋째 아들인 이현일이 이조판서에 오르면서 '정부인' 품계가 내려졌다.
남편 이시명은 병자호란의 국치를 부끄럽게 여겨 벼슬을 버리고 영양군 석보면 두들마을로 들어와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전념했다. 두들마을엔 이들 부부가 살던 석계고택이 있다. 이곳에서 장계향은 「음식디미방」을 저술하며 말년을 보냈다. 「음식디미방」의 '디'는 '알 지知'의 옛말로, '음식 맛을 아는 방법'이라는 의미를 품고 있다.
재료 자체가 가진 본연의 맛을 최대한 살린 '웰빙 식단'
오장을 통하게 하고 살찌게 하는 숭어, 자양강장에 좋은 오미자,
기관지 기능을 강화하는 더덕 등 몸에 이로운 재료만 골라 썼다
이 조리서를 통해 조선 중엽 경상북도 양반가에서 실제 만들던 음식의 조리법과 저장 발효식품, 식품 보관법 등을 들여다볼 수 있다. 총 1백46가지의 음식 조리법 중 가루 음식과 떡 종류가 18종, 어육류가 74종, 술이 51종, 식초류가 3종이다. 중국 음식 서적을 참고하지 않고, 집안 대대로 전해지거나 스스로 개발한 조리법을 기록했다는 점도 가치를 더한다. 오늘날 「음식디미방」의 요리들은 재령 이씨 석계파 13대 조귀분 종부에 의해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경북 영양군은 「음식디미방」에 소개된 음식을 복원하고, 그 우수성을 널리 알리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 일환으로 2009년엔 허성미 안동과학대 교수에게 ‘음식디미방 레시피 표준화 사업’을 의뢰했다. 허 교수는 조귀분 종부와 함께 고조리서에 소개된 음식들을 하나하나 만들어보며 실용적으로 복원하는 작업을 했다. 그 결과 70여 종의 요리를 복원하는 데 성공했다.
조귀분 종부는 「음식디미방」 요리는 재료 자체가 지닌 본연의 맛을 최대한 살린 ‘웰빙 식단’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오장을 통하게 하고 살찌게 하는 숭어, 자양 강장에 좋은 오미자, 기관지 기능을 강화하는 더덕 등 몸에 이로운 재료만 골라 썼다. 양념은 고춧가루가 전혀 들어가지 않고, 찌거나 굽는 방법으로 담백하게 조리한다.
도토리죽에는 나눔의 삶을 실천한 장계향 선생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두들마을 주변에 아름드리 참나무(도토리나무)를 잔뜩 심은 그녀는
병자호란 때 피난민들을 구휼하기 위해 도토리죽을 끓여 온정을 나눴다
장계향문화체험교육원에서는 이러한 복원 음식들로 구성한 '음식디미방 정부인상'을 맛볼 수 있다. 단, 10인 이상의 단체가 사전 예약해야 한다. 전채 요리는 떠먹는 술인 감향주와 도토리죽. 도토리 가루와 찹쌀가루를 섞어 쑨 도토리죽에는 나눔의 삶을 실천한 장계향 선생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두들마을 주변에 아름드리 참나무(도토리나무)를 잔뜩 심은 그녀는 병자호란 때 피난민들을 구휼하기 위해 도토리 열매로 죽을 끓여 온정을 나눴다고.
주요리는 잡채, 어만두, 동아누르미, 가지누르미, 연근채, 빈자법, 섭산삼, 가제육 등 10여 가지 음식으로 구성된다. 누르미란, 녹말을 넣어 걸쭉하게 만든 즙액을 익힌 채소와 고기 등에 붓거나 섞어 만든 요리를 가리킨다. 채소, 고기 등을 꼬치에 꿰고 달걀 물을 입혀 부치는 누름적의 원형이다. 후식으로는 석이버섯을 넣어 만든 떡인 석이편에 진달래 화전, 오미자차를 곁들인다.
수백 년의 세월을 거슬러 재현된 밥상은 다채로우면서도 우아한 멋이 가득하다. 경상북도와 영양군은 「음식디미방」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올리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Where to eat?
장계향문화체험교육원
A 경상북도 영양군 석보면 두들마을1길 42
T 054-680-6440
H 09:00-18:00 (사전 예약 필수)
W www.yyg.go.kr/jghcenter
음식디미방 상차림의 꽃 三色三味
「음식디미방」은 한글로 조리 과정이 쉽고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있어 식재료만 갖춘다면 당시의 요리 그대로의 맛에 도전할 수 있다. 조리서에서 복원한 요리 중 특히 주목할 세 가지.
갖가지 채소와 육수 드레싱 잡채
잡채雜菜의 '잡'은 섞는다는 의미고 '채'는 채소를 뜻한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잡채의 원형은 다양한 채소를 버무린 음식이다. 장계향 선생은 잡채의 식재료를 20여 가지 적어놓고선 '구하기 쉬운 재료를 써라'라고 덧붙였다. 복원된 잡채는 맨드라미 꽃물을 들인 동아(박의 일종)와 미나리, 오이, 석이버섯, 시금치, 무, 도라지, 고사리, 표고버섯, 꿩고기 등을 볶아 그릇에 보기 좋게 담았다. 그리고 꿩고기 육수에 간장, 참기름, 후춧가루, 천초 가루, 밀가루, 된장 등을 넣어 걸쭉하게 만든 소스인 '즙'을 뿌려 섞어 먹는다. 다양한 식감의 채소와 담백한 소스가 어우러져 정갈한 맛을 낸다.
밀가루 대신 생선 어만두
어만두는 밀가루로 만든 피 대신 생선을 얇게 떠서 만두피로 만들고 그 안에 소를 넣어 찐 요리다. 살이 부스러지지 않게 최대한 얇게 생선포를 떠야 하므로 만들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살이 비교적 단단한 숭어, 광어 등을 주로 사용한다. 만두소로는 꿩고기와 석이, 송이버섯 등을 넣는다. 잘게 다져서 간장기름에 볶은 소를 생선포 안에 넣어 빚는다. 이때 '포를 구부정하게 말라'고 조리서에 적혀 있다. 그러면 제법 만두 모양처럼 나온다. 이것을 찜통에 쪄내면 완성. 식으면 생선살이 단단해지기 때문에 찌자마자 먹는 것이 가장 좋다. 담백하고 고소한 숭어 살을 꼭꼭 씹으면 버섯과 고기의 즙이 진하게 우러나온다.
요구르트처럼 떠먹는 술 감향주
甘香酒. 달고 향기로운 술. 이름처럼 딱 그러하다. 작은 잔에 요구르트처럼 걸쭉하고 하얀 술이 담겨 있다. 특이한 점은 숟가락으로 떠먹어야 한다는 것. 한 숟갈 떠먹으면 쌉쌀하면서도 달콤한 맛과 향이 입안 가득 퍼진다. 알코올 도수는 12도 정도. 맛있다고 계속 떠먹다가 얼굴이 금세 발그레해질 수도 있다. 달콤한 맛의 비결은 술을 빚는 과정에서 찹쌀을 멥쌀보다 많이 넣기 때문. 멥쌀과 누룩을 3일간 둬서 밑술로 만들고, 찐 찹쌀을 고루 섞어 한 달간 발효시키면 완성. 발효 온도에 따라 맛이 쉽게 변하기 때문에 제대로 빚기가 여간 까다롭지 않다.
+MINI INTERVIEW
3백 년 손맛 그대로
조귀분 종부(재령 이씨 석계파 13대)
「음식디미방」의 요리들이 역사적 기록으로만 남지 않고 오늘날 그대로 이어진 데는 조상의 뜻을 귀중하게 여기고 받든 후손들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석계종택의 종갓집 맏며느리인 조귀분 종부는 <장계향문화체험교육원>에서 음식디미방 아카데미를 이끌며 선대의 자랑스러운 유산을 바르게 알리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고조리서를 복원하게 된 계기는?
집안에서 유일본으로 보관하던 이 책이 외부에 알려진 건 1960년 경북대 교수로 재직했던 국문학자 김사엽 박사의 논문을 통해서다. 그러다가 1999년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장계향 할머니를 ‘이달의 인물’로 선정하면서 매스컴의 큰 관심을 받았다. 2006년엔 경북대 국문과 백두현 교수가 「음식디미방」을 현대어로 바꾸는 작업을 해주었고, 영양군도 적극 밀어주면서 음식 복원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됐다.
3백 년 넘는 세월 동안 조리서를 대대로 보관해온 방법은?
「음식디미방」의 맨 뒷장에 장씨 할머니의 당부가 적혀 있다. ‘이 책을 이렇게 눈이 어두운데 간신히 썼으니 이 뜻을 알라. 이대로 시행하고 딸자식들은 각각 베껴 가되 이 책을 가져갈 생각일랑 언감생심 내지 말며….’ 시집간 딸이 책을 가져가거나, 가택 수색을 받는 일이 생기면 없어질 우려가 있으니 원본은 잘 보관하고 베껴 가라 한 것이다. 그걸 후손들이 잘 따랐다. 참으로 영민한 분이었다. 직접 쓴 글씨도 마치 인쇄를 한 것처럼 흐트러짐이 없다.
다른 조리서에서 찾아볼 수 없는 「음식디미방」만의 조리 특징은?
다른 가문의 요리와 단순 비교하기 어렵다. 일상에서 평범하게 먹는 요리들은 아예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조리서엔 밥과 죽에 대한 설명은 없다. 대신 특별한 날에만 먹는 귀한 음식 위주로 적어놨다. 김치류도 꿩고기와 오이지를 섞어 만든 꿩짠지, 이른 봄 눈 속에서 나는 나물의 일종인 산갓으로 만든 김치 등 특이한 것뿐이다. 거의 궁중 음식 수준이다. 주변에 궁중 요리에 해박한 분이 있었다. 장씨 할머니의 외증조할아버지는 궁중 음식 담당 부서의 주부였고, 이모는 수라간 상궁이었다.
조상의 슬기를 보여주는 한 대목, 소개한다면?
땅속에 겨우내 먹을 채소를 저장하는 움막을 만들었다는 내용이 있다. 땅을 파서 가마니를 넣고 거기에 배추나 무를 묻어둔 거다. 전복은 참기름에 재워두면 오래 보관할 수 있다는 기록이 있다. 복숭아 보관법도 있다. 진하게 쑨 밀가루 풀을 식혀서 새 항아리 속에 복숭아와 함께 담가두면 두고두고 먹을 수 있다고. 생활 속 과학을 아주 잘 알고 계셨다. 요즘 말로 ‘슈퍼우먼’을 넘어선다.
앞으로의 계획과 목표는?
「음식디미방」을 사람들에게 제대로, 바르게 알리고 싶다. 원전 그대로의 레시피를 가르쳐도, 그걸 배운 사람들이 자기 식대로 조리 방법을 바꾸면서 ‘음식디미방 요리’라고 말하고 다니면 곤란하다. 경제적,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다면 근사한 식당을 지어서 사람들에게 제대로 된 음식디미방 요리를 대접하고 싶은 마음도 있다. 해외에 「음식디미방」을 알릴 기회는 많아질 것 같다. 올겨울엔 일본에서 「음식디미방」의 요리를 시연하는 행사가 있을 예정이다. 담백한 건강식이라 일본인들이 무척 좋아한다.
글 정민아 <바앤다이닝> 에디터 사진 윤동길, 강현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