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식 읽기 좋은 날
Vol 5. 서울에서 찾은 이북의 맛
서울에서 찾은 이북의 맛 ①
향토 미식 로드 _ 어복쟁반과 이북식 찹쌀순대
한반도에 불고 있는 평화 기류에 대해 전 세계가 주목하는 요즘, 우리의 미식 여행은 가깝고도 낯선 땅, 북한으로 향했다. 정확히는 ‘이북의 맛’을 찾아 떠났다. 허락되지 않은 땅의 온기를 가장 쉽게 느낄 수 있는 방법으로 음식만한 것이 있을까. 원래 뿌리는 하나인 또 하나의 한식, 이북 음식을 맛보고 이해하며 아직은 갈 수 없는 땅, ‘북한’의 문화와 전통을 조금이나마 전하고 싶었다.
6개 키워드를 따라 경험한 ‘이북의 맛’은
잊지 말고 이어져야 할 ‘한반도의 맛’이었다.
우선 ‘지금 한국에서 맛볼 수 있는’ 대표 이북 음식을 찾았다. 백정들이 상품가치가 없는 소의 뱃살을 삶아 먹은 데서 기원했다는 어복쟁반, 함경도 일부 부유한 가정에서만 즐겨 먹은 가릿국밥, 지역마다 다른 이야기를 품고 있는 이북식 순대와 만두, 여전히 뜨거운 인기를 누리는 평양냉면 그리고 실향민의 생존 수단이자 애환을 담아낸 함흥냉면까지. 우리가 만난 이북의 맛을 소개한다.
함께 모여 끓여먹던 어복쟁반
어복쟁반은 추운 겨울 둥글게 둘러앉아 육수를 부어가며 끓여 먹던 평양 향토 별미. 장터 백정들이 상품 가치가 없는 소의 뱃살을 끓여 먹던 것이라 ‘우복’으로 불리다 ‘어복’이 되었다는 설, 그 맛이 하도 기가 막혀 관직에 있던 이가 임금에게 진상해 ‘어복’으로 불렸다는 설 등 이름에 얽힌 이야기는 분분하다. 한마디로 이북식 소고기 전골인데, 놋 쟁반에 소고기 편육과 각종 채소를 돌려 담은 뒤 육수를 부어 먹는다. 단 식사 내내 불을 끄지 않는다. 간을 거의 하지 않고 국물이 졸면 다시 육수를 더해 먹으니 재료 자체의 담백한 맛을, 또 우러날 때마다 진해지는 국물 맛을 즐길 수 있어 일석이조.
소고기 자체가 귀했기 때문에 사냥으로 쉽게 꿩을 잡을 수 있었던 과거엔 꿩고기 육수를 냈으나, 요즘엔 반대로 꿩고기가 워낙 구하기 어렵고 값도 비싼 탓에 대개 소고기 육수를 쓴다. 한국전쟁 후 북한 실향민은 남한의 지역 재료로 맛을 낸 제2의 어복쟁반을 전파했는데, 그래서인지 가게마다 그 맛과 모양이 조금씩 다르다.
사냥으로 꿩 고기를 쉽게 구할 수 있었던 과거엔 꿩고기로 육수를 냈으나, 요즘엔 소고기로 육수를 내는 게 일반적이다.
소고기 편육과 채소를 담아 육수를 부어 끓여 먹는 기본 틀은 같다. 하지만 양지와 지라(소의 비장), 유통, 우설 등 저마다 사용하는 고기 부위도 다르고 쟁반에 푸른 채소 몇 가지만 담아내는 곳이 있는가 하면, <남포면옥>은 부드러운 육질을 즐길 수 있는 유통과 씹는 맛을 주는 양지, 각종 채소, 느타리, 표고, 궁뎅이 버섯 등 다양한 종류의 버섯까지 갖가지 재료를 가득 올려 맛도 영양도 풍부한 육수를 내놓는다.
쟁반 한가운데는 양념간장 자리. 다 같이 둘러 앉아 먹는 음식이었기 때문인데, 최근 위생상 간장을 쟁반에 담지 않고 개별적으로 제공하기도 한다. 면이나 만두로 사리를 추가해 먹는 것도 놓칠 수 없는 별미. 고기와 채소를 건져 먹은 후 각 재료의 맛이 진하게 우러난 국물에 면을 끓여 한 젓가락 휘리릭 감아 먹거나, 만두를 넣어 먹으면 그제야 어복쟁반을 제대로 먹었다고 할 수 있다. 단 메밀 면은 금방 눌러 붙으니 한 눈을 팔지 말아야 한다.
쟁반 한가운데는 양념간장 자리.
면이나 만두로 사리를 추가해 먹는 것도 놓칠 수 없는 별미다.
Where to Eat?
남포면옥
45년여 간 한 자리를 지키고 있다. 평양냉면도 유명하지만 서울에서 거의 처음으로 선보였다는 어복쟁반을 찾는 손님이 많다. 매장 입구에 늘어서 있는 항아리도 장관인데, 평양냉면 육수로 쓰는 직접 담근 동치미가 담겨 있다.
A 서울시 중구 을지로3길 24
T 02-777-3131
향긋하고 쫀득한 이북식 찹쌀순대
순대는 옛 몽골의 칭기즈칸이 장기간 전투 중 충분한 영양분을 섭취하기 위해 돼지 창자에 쌀과 채소를 넣어 지니고 다녔던 음식에서 시작됐다. ‘순대’란 단어도 만주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피와 창자를 뜻한다. 유목민, 즉 기마족 문화에서 비롯된 음식인 만큼 한반도의 남쪽보단 북쪽에서 흔히 만들어 먹었으며, 지금까지도 북한에선 ‘소울푸드’로 불릴 만큼 선호도가 높다. 전통적으로 마을에서 돼지를 잡으면 머리고기를 갈아 넣고 순대를 만들어 잔치를 벌이듯 함께 나눠 먹었다.
이북 음식 전문점 <동무밥상>은 1~2주마다 하루 반나절을 온전히 순대 빚는 일에 쓴다. 돼지의 작은창자를 뒤집어 깨끗하게 씻은 뒤 명실로 한쪽 끝을 묶으면 속을 채울 준비가 끝난다. 빨간 돼지 선지에 쫀득한 찹쌀과 다진 돼지고기, 우거지, 깻잎, 대파, 양파 등의 채소를 섞어 순대 속을 만들고, 가능한 창자에 공기가 차지 않도록 정성스럽게 채운 후 실로 묶어 마무리한다. 돼지고기와 우거지, 깻잎은 영양학적으로도 궁합이 좋다고.
한국에 처음 와서 놀란 게 순대에 국수(당면)가 꽉 차 있는 거였어요.
이북에선 순대에 찹쌀, 우거지, 선지가 꼭 들어가요.
커다란 솥에 순대를 넣고 물이 끓기 시작한 후 20분을 더 끓여내는데, 이때 순대가 바닥에 달라붙지 않도록 잘 저어주면서 쉼 없이 지켜봐야 한다. 또 공기가 많이 들어간 순대가 둥둥 떠오르면 나무 막대를 뾰족하게 갈아 만든 꼬챙이로 곳곳에 구멍을 내 순대 옆구리가 터지지 않도록 예방하는 수고도 동반된다.
신선한 재료로 만들어 갓 삶은 순대에선 우거지의 구수한 향이 기분 좋게 감도는데, 이 향이 바로 이북식 찹쌀순대의 캐릭터. 하룻밤 식힌 다음 다시 찐 후 얇게 썰면 더욱 쫄깃한 식감을 즐길 수 있다. 잘 만든 찹쌀순대를 간장에 찍어 먹노라면 오감의 만족이 차오르며 다른 별미가 필요치 않다. 딱 순대 하나로 족하다.
신선한 재료로 만들어 갓 삶은 순대에선 우거지의 구수한 향이 기분 좋게 감도는데,
이 향이 바로 이북식 찹쌀순대의 캐릭터.
Where to Eat?
동무밥상
평양 <옥류관>에서 요리를 배우고 인민군 <장성식당>에서 근무한 윤종철 대표가 이북 음식을 현지식으로 선보인다. 북한 내 여러 지역 중에서도 가장 맛있는 요리만 모아 메뉴로 구성했다.
A 서울시 마포구 양화진길 10
T 02-322-6632
+ 맛있는 한식 상식
전국 팔도, 순대의 모든 것
아바이순대
1.4 후퇴 당시 국군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왔다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함경도 실향민이 지금의 ‘아바이 마을’인 속초 청호동에 모여 살며 지역 재료로 만들어 먹기 시작한 것. 함경도식 찹쌀순대가 변형된 형태로 돼지 대창을 주로 사용하며, 선지와 찹쌀, 숙주, 배춧잎, 무청 시래기, 우거지 등으로 속을 채운다.
오징어순대
이북의 동해안 지역에서 즐겨 먹는 향토 음식. 현재 속초 명물로 잘 알려진 오징어순대도 함경도의 오징어순대에서 비롯되었다. 함경도에선 식은 밥과 시래기를 오징어 속에 채워 쪄 먹었는데, 형편이 넉넉하면 두부와 오징어 다리 등을 넣거나 커다란 오징어를 쓰기도 했다. 현재 속초에선 작은 오징어에 당근과 당면, 버섯, 숙주 등 더욱 풍부한 재료로 속을 채우며, 달걀옷을 입혀 전처럼 부쳐 먹기도 한다.
명태순대
동해안 북부 지역의 향토 음식으로 김장철에 많이 만들어 겨우내 반찬으로 먹거나 명절 때 손님상에 낸다. 특히 조선시대 한반도 최초로 명태가 발견된 함경북도 명천이 명태순대로 유명하다. 소금에 절여 하룻밤 재운 명태의 내장을 빼내고 씻은 다음 뱃속에 배추와 숙주, 돼지고기, 된장, 두부, 동태 알, 이리 등으로 소를 채우고 아가리를 꿰맨다. 줄줄이 매달아 얼린 채 보관한 다음 그때그때 먹을 만큼만 꺼내 채반에 쪄낸 후 썰어 먹는다.
백암순대
본래 조선시대 죽산군(현 안성)을 중심으로 만들어 먹던 순대. 하지만 죽산군이 쇠퇴하며 인근 고을에서 열리는 백암 5일장으로 명맥이 이어졌다. 현재는 경기 용인 처인구 백암면의 대표 향토 음식으로 알려져 있다. 돼지 내장에 찹쌀과 차조, 두부, 숙주, 콩나물, 배추, 양배추, 부추, 돼지 살코기, 돼지 부속물 등을 푸짐하게 넣어 모양새가 큼직한 것이 특징. 돼지 선지 대신 소 선지를 사용하기도 하며 선지의 비율이 적어 다른 지역 순대에 비해 밝은 색을 띤다.
병천순대
천안 아우내장터의 5일장에서 만들어 먹기 시작해 ‘아우내순대’라고도 부른다. 1960년대 병천면에 햄 공장이 들어서면서 주민들이 햄을 만들고 남은 돼지 부산물을 활용한 것이 병천순대의 시초. 부드러운 돼지 소창에 선지와 들깨, 배추, 양파, 대파, 양배추, 고추, 새우젓, 찹쌀 등을 넣는데, 고기와 당면을 거의 넣지 않고 채소와 찹쌀 위주로 속을 채우며 선지의 비율이 높은 편이다.
암뽕순대
전라남도의 향토 음식. 암뽕순대는 사실 암뽕으로 만든 순대가 아닌데, 돼지 막창과 대파, 숙주, 당근, 선지, 찹쌀가루로 만든 순대와 암뽕을 삶은 수육을 함께 먹기 때문에 그렇게 불린다.
제주 전통 순대
제주말로 ‘수애’나 ‘수웨’라고 불리는 제주식 전통 순대. 돼지고기가 들어간다는 뜻에서 ‘돗수애’라고도 한다. 돼지 내장에 찹쌀 대신 메밀가루를 선지와 섞어 넣는 방식. 식자재 수급 상황에 따라 메밀가루 대신 보릿가루를 쓰기도 했으며, 부추나 쪽파, 마늘, 소금을 혼합해 속을 채우기도 한다. 관혼상제 등의 중요한 경조사를 치르거나 동네잔치를 벌일 때 만들어 먹던 별미, 제주의 또 다른 대표 음식 ‘몸국’의 주재료이기도 하다. 그중에서도 막창자를 사용한 ‘막창수애’는 두툼하고 지방이 많아 고소한 맛과 식감을 제대로 즐길 수 있다.
에디터 홍수연, 이미진, 전채련 사진 윤동길, 이재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