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식에 대한 다채로운 이야기를 전하는 온라인 매거진
Vol 1. 한식으로 여름나기
조선시대에는 보양식이 없었다.

보양식은 없다
보양식은 없다. 보양식은 ‘保養食’ 혹은 ‘補陽食’이다. 앞의 보양(保養)은 잘 보호하고 기른다는 뜻으로 여름에 먹는 보양식과는 관련이 없다. 두 번째 보양(補陽)은 양기를 북돋워 준다는 뜻이다. 민어, 장어, 닭, 보신탕 등을 먹는 걸 이른다. 조선시대에는 여름철 보양을 위하여 특별한 음식을 먹는 일이 없었다. 홍석모(1781-1850)의 「동국세시기」에 개장(狗醬)국 끓이는 법과 “여름철에 먹으면 시원하고 여름나기 좋다”는 문구가 있지만 조선시대 개고기는 별식(別食)이 아니라 상식(常食)이었다.
여름철에 민어를 먹는 것은 양력 7, 8월에 많이 잡혔기 때문이다. 교산 허균(1569-1618)은 「성소부부고-도문대작」에서 “민어 등은 서해안 전역에서 두루 많이 잡히기 때문에 별도로 언급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따라서 ‘민어탕이 반가의 보양식’이라는 말은 근거가 없다.
여름철에 민어를 먹는 것은
여름이 민어의 제철이기 때문이다.
민어는 반가의 여름 보양식이라는 표현은 틀렸다.


삼계탕은 우리시대에 생긴 음식이다.
인삼의 냉장 유통이 힘들었던 시절엔 백숙이 흔한 닭고기 음식이었다.
삼계탕은 1960년대 무렵 처음 시작된 음식이다. 삼계탕에 사용하는 수삼(水蔘)은 냉장 유통이 필수다. 조선시대의 삼은 원래 산삼이었는데 영, 정조 시대를 지나면서 가삼(家蔘)의 양식 재배가 시작된다. 덕분에 인삼이 비교적 흔해졌지만 국가는 인삼과 홍삼을 엄격히 관리했다. 조선시대에 인삼이 들어간 삼계탕은 없었다.
조선시대 닭요리는 물로 찐 수증계(水蒸鷄), 연계 백숙(軟鷄白熟), 닭고기가 들어간 연포탕 등이다. ‘영계백숙’은 없었다. ‘영계’는 ‘YOUNG’과 ‘鷄’의 합성어로 엉터리다. 「오주연문장전산고-만물편」에 영계(英鷄)가 있긴 하다. 그러나 이는 석영(石英) 먹여 기른 닭이라는 뜻이며, 이 닭을 먹는 것이 아니라 “영계가 낳은 달걀이 효험이 있다”는 중국 「본초강목」의 기록을 옮긴 것일 뿐이다.
「일성록」 정조24년(1800) 5월 22일의 기록에 세 종류의 닭이 등장한다.
“생계(生鷄)는 세 종류가 있습니다. 여러 해 자란 닭은 진계(陳鷄), 부화한 지 오래지 않은 것은 연계(軟鷄), 진계도 아니고 연계도 아닌 것은 활계(活鷄)입니다”
이 기록에는 진계 1마리 값과 활계 2마리 값이 같다는 내용도 덧붙여 있다. 여러 해 자란 닭을 더 높게 쳤다.

얼음으로 음양의 조화를 이루다
조선시대 여름나기의 필수 재료는 얼음이었다. 얼음에는 두 가지 기능이 있다. 음식을 상하지 않게 하는 것과 음양의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조선시대 한양에는 동빙고와 서빙고가 있었다. 현재 ‘서울특별시 동빙고동’은 동빙고(東氷庫)가 있던 자리다. 동빙고는 이미 정해진 궁중의 제사 등에 사용할 얼음을 보관하는 곳이다. 동빙고, 서빙고는 외빙고(外氷庫)로 분류되었고 궁궐에는 내빙고(內氷庫)가 따로 있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8년(1426) 11월 3일의 기록에 ‘얼음’이 등장한다. 세종이 “얼음을 저장하고 얼음을 내는 것은 비단 상제(喪祭)를 위할 뿐 아니라, 실상 음양(陰陽)의 부조화를 고르게 하는 데도 관계가 있는 것이니 가벼이 하지 말라”고 말했다.
상제를 위한 얼음은 동빙고에 보관했다. 여름 음식은 쉽게 상한다. 궁중·종묘의 각종 행사 음식이 상하지 않게 얼음을 사용했다.
서빙고는 국가, 궁중에서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얼음을 보관하는 곳이다. 규모는 서빙고가 동빙고에 비해 8배 정도 컸다. 여름철에는 국가에서 벼슬아치를 비롯하여 여러 사람들에게 직급 별로 얼음을 나눠주던 반빙(頒氷)의 관습도 있었다. 옥살이를 하는 이들에게 얼음을 나눠주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한식 아카이브 속 기록

술 취한 중이 밤에 일어나 얼음 깨무는 것을 조롱하다
밤중에 술 깨어 찬 얼음 깨무니 / 酒醒中夜嚼寒氷
온갖 맛 좋은 음식 여기에 당하랴 / 百品珍羞敵未能
이런 맛 한평생 나 혼자만 아는가 했더니 / 此味平生疑獨享
늙은 중이 나 먼저 일찍이도 알았구나 / 老髡先我飽嘗曾
한식 아카이브 조선시대 민간음식 고문헌 「동국이상국집」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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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특히 개와 늑대의 시간에 드리운 어두운 코발트 빛 하늘이 서편 너머로 물러날때 겨드랑이를 가볍게 툭 치듯 들어와 코 끝과 이마 자락을 간지럽히며 사라지는 기분좋은 선들바람이 불어옵니다. 서쪽이라면 하늬바람일텐데 아무래도 산너머서 온 산들바람입니다. 시원하고 가볍게 부는 이 바람이 가을로 접어들면 건들바람이 되면서 아주 조금 바람이 세집니다.
얼음은 음과 양이 조화를 이루도록 돕는다. 얼음은 빙부(氷夫)들이 한겨울 한강변에서 채취했다. 겨울과 얼음은 모두 ‘음(陰)’이다. 얼음 채취는 힘든 노역이었다. 빙부가 부족하면 군인, 승려 등을 동원하기도 했다. 채취한 얼음은 빙고에 저장한다.
이듬해 봄, 얼음 창고를 열고 얼음을 꺼낸다. 더운 여름은 ‘양(陽)’이다. 여름에 얼음을 사용하는 것은, 세종대왕의 표현대로 음과 양이 조화를 이루도록 하는 것이다.
사계절 중 무더운 한여름은 양이다. 양의 계절에 양의 음식인 뜨거운 고기 국물을 더하여 보양을 하는 것은 미련함이다. 영양 과잉 상태라서 다이어트가 필요한 사람들이 많다. 한식의 기본은 평(平)이다. 밥(음(陰))과 국(양(陽))이 평을 이룬다. 탕반이 기본인 음식이다. 조선시대, 보양식은 없었다.
장어 역시 보양식은 아니다.
조선시대에는 장어에 대해서 깊이 알지 못했다.
장어를 보양식으로 먹었다는 기록은 없다.

겨울에는 달력, 여름에는 부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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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冬至는 양력 12월 22일, 23일이다. 낮이 짧고 밤이 가장 긴 날이다. ‘동짓달 기나긴 밤’은 이날부터 조금씩 짧아진다. 밤(음(陰))이 줄어들고 낮(양(陽))이 늘어나기 시작한다. 동짓날은 ‘아세(亞歲)’, 작은 설날이다. 새해다. 조정에서는 이날 신하들에게 달력을 나눠주었다.
단오는 양의 숫자인 ‘5’가 겹치는 날로. 극양의 더운 날이다. 조정에서는 이날 신하들에게 부채를 나눠주었다. 단오선(端午扇)이다. 공조에서 준비한 부채를 모든 신하들과 외직의 관리들에게 나눠주었다.
조선후기 실학자 이덕무(1741-1793)는 정조10년(1786) 적성현감을 지냈다. 이덕무의 아들 광규가 정리한 「청장관전서-석고 적성현감 부군 연보」 음력 5월 초하루의 기록에 “왕세자가 내리는 단오선(端午扇) 한 자루를 하사받았다. 대전(大殿)에서 내린 백첩선(白貼扇), 칠첩선(漆貼扇) 각 1자루를 하사받았다”고 적었다. 모두 부채다.
이 글의 ‘왕세자가 내린 단오선’에는 애틋한 사연이 있다. 왕세자는 정조와 의빈 성 씨 사이의 문효세자(1782-1786년 음력 5월 11일)다. 정조는 문효세자를 지극히 아껴 어린 나이에 왕세자로 세운다. 그러나 문효세자는 다섯 살 때 홍역으로 세상을 떠나는데, 바로 이 무렵이다. 부채를 받은 날은 5월1일, 문효세자가 세상을 떠난 날은 5월11일로 불과 열흘 차이다.
조선 말기에는 단오선 대신 여러 가지 부채가 등장한다. 고종 때 영의정을 지낸 문신 이유원(1814-1888)의 「임하필기-벽려신지(薜荔新志)」에는 “가지각색의 비단을 부채에 발라서 부치다가 곧 모두 폐지하고, 또 붉은색을 숭상하다가 얼마 안 가서 폐지하였다. 지금은 전부가 소절선(小切扇)을 사용한다. 한때의 유행은 아무리 작은 물건이라 하더라도 역시 마찬가지”라고 했다. 조선 말기에는 여름철 부채도 시대의 유행에 따라 달라졌다.

황광해 (음식평론가)
연세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여 경향신문사, 서울문화사 기자 및 편집장을 맡았다. 동아일보 ‘황광해의 역사속 한식’ ‘황광해의 우리가 몰랐던 한식’ ‘역사 속 한식이야기’, 현재는 주간한국 ‘이야기가 있는 맛집’ 등 한식과 관련한 다양한 칼럼들을 연재 중이다. 저서로는 [한국의 맛집 579], [줄서는 맛집],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오래된 맛집] 등이 있다. “착한 식당” 검증위원으로 활동했으며 전국 곳곳의 맛집 열 바퀴쯤은 돌며 음식 평론 글들로 독자들과 소통하고 있다.
이 글은 필자의 의견으로, <한식진흥원> 의 의견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