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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을 담고 문화를 비추는 ‘한식 도구’의 비밀

한식 인사이트

2026/07/02 17: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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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둘러싼 물건은 우리가 누구인지 말해준다. 매일 쓰는 그릇과 수저에도 우리의 정체성이 스며 있다. ‘무엇을 먹느냐’만큼 ‘무엇을 담아 먹느냐’가 개인과 문화의 결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한국의 식문화를 이해하기 위해 음식뿐 아니라 그릇과 식도구까지 살펴봐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서양의 코스 요리가 ‘시간의 순서’라면, 한식은 ‘공간의 질서’로 음식을 배열한다. 모든 음식을 한꺼번에 내놓는 밥상 위에서 그릇은 일종의 지휘자 역할을 한다. 밥그릇, 국그릇, 찬기, 종지가 저마다의 크기와 깊이로 한 상의 균형을 완성하는 것이다. 1939년의 문헌 《조선요리법》에는 어른 상차림에서 그릇 뚜껑 여는 순서를 ‘국그릇→진지 그릇→김치 그릇’으로 정해두었는데, 이 그릇들이 지닌 밥상 위의 서열을 보여준다. 우리는 이 질서에 따라 국으로 먼저 입을 적신 후, 밥과 반찬을 번갈아 먹으며 입안에서 맛을 완성해간다. 이 ‘융합’의 미학을 가능케 하는 매개가 바로 그릇이다. 단순히 음식 담는 도구를 넘어 우리 문화의 거울이 되어온 한식 그릇, 그 속에 숨은 기호와 미학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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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한식에서 그릇은 신분을 나타내는 기호였다. 밥과 국, 김치, 장류, 찌개 등을 제외하고 쟁첩(접시)에 올리는 반찬의 가짓수를 뜻하는 ‘첩수’는 곧 먹는 사람의 신분이었다. 서민의 일상식이던 삼첩부터 양반가의 오첩·칠첩·구첩, 최고의 격식을 차린 왕실의 십이첩(수라상 등)까지 그야말로 그릇 개수가 곧 신분의 언어였다. 

그릇의 재료 역시 신분에 따라 엄격히 달랐다. 조선 왕실은 시기별로 백자, 청화백자 등 다양한 형태의 자기를 주로 사용했다. 고려 귀족에 이어 조선 양반가의 사랑을 독차지한 것은 얇고 질긴 ‘방짜 유기’였다. 조선 후기에는 놋그릇을 만들기 위해 시중의 엽전까지 녹이는 바람에 나라에서 금지령을 내렸을 정도다. 망치로 일일이 두드려 만드는 방짜 기법은 오늘날 한국 금속공예의 정수로 꼽힌다. 반면 서민들은 막사기와 질그릇(옹기), 목기 등 실용성 높은 식기를 사용했다. 같은 음식을 먹더라도 어떤 그릇에 담아내는가에 따라 신분과 생활수준이 드러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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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의 발효 문화는 항아리를 빼고 설명하기 어렵다. 된장, 간장, 김치는 항아리의 독특한 구조와 땅속 저장법이 만든 합작품이다. 부드러운 도토(도기용 진흙)를 비교적 낮은 온도에서 구워 만든 옹기는 미세한 구멍을 통해 수분은 차단하고 공기는 통과시킨다. 미생물이 살아 숨 쉬는 환경을 만드는 ‘숨 쉬는 그릇’의 비밀이다. 우리 조상들은 이 항아리를 온도 변화가 적은 땅속에 묻어 김치·무 등의 음식을 저장했고, 술과 식초·젓갈·장류는 실온이나 굴에서 숙성시켰다. 

지역별 기후에 따른 항아리의 형태 변화도 흥미롭다. 일조량이 많은 남부 지역은 열과 수분 손실을 줄이기 위해 배가 불룩하고 입구가 좁은 형태를, 중부와 북부 지역은 햇빛과 열을 더 받기 위해 홀쭉하고 키가 큰 형태를 만들었다. 항아리 하나에 기후학이 담긴 셈이다. 이처럼 과학적인 옹기는 저장 용기를 넘어 물동이, 쌀독, 시루, 약탕기까지 서민의 삶 전반에서 팔방미인으로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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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 선생이 “먹을 때에만 나타나고, 다 먹고 나면 빈 그릇처럼 비어서 물러간다”고 표현했듯, 한식의 상(床)은 필요할 때 모습을 드러내 공간을 창조하는 기물이다. 그중에서도 소반은 미감과 기능성 측면에서 그야말로 으뜸이다. 형태에 따라 둥근 소반·사각 소반, 다리 모양에 따라 호족반(호랑이 다리 모양)·구족반(개의 다리 모양)·일주반(기둥 하나) 등으로 나뉘는 소반은 미와 기능이 조화를 이룬 예술품이다. 무엇보다 소반은 ‘한 사람을 제대로 대접한다’는 평등성을 품고 있다. 그래서 임금부터 서민은 물론, 밥 빌러 온 거지에게도 소반에 밥을 차려주었다. 사람이 음식으로 가는 대신 음식을 사람에게 가져다주는 인간 중심적 문화가 소반에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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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한식 기물은 박제된 유산이 아닌, 끊임없이 재해석되는 현재진행형이다. 연탄가스 시대에 사라질 뻔했던 유기는 뛰어난 항균 기능과 전통 미감을 앞세워 우리 품으로 돌아왔다. 최근에는 무게를 줄여 가벼운 티타늄 유기까지 등장했다. 소반 역시 MZ세대의 다도용품이나 거실 오브제로 쓰임을 확장했다. 이제 한식 그릇이 글로벌 파인다이닝의 플레이팅 기물로 등장하는 모습이 더 이상 낯설지 않다. K-푸드의 확산은 단지 음식만의 확산이 아니다. 한식 그릇에 담긴 미학과 철학도 세상 속으로 함께 이동하고 있다.

참고 자료

<시의전서>, <연려실기술 별집>, <음식방문>, <음식의 문화를 말하다>,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 <조선 왕실의 식탁 1>, <조선요리법>, <K FOOD: 한식의 비밀>, <한국의 발효식품>, <증보산림경제>


자료 제공

하지훈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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